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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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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Xtina
Summary by : Xt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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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 시기: 10월 06, 2007
볼리비아의 역사
 
볼리비아는 잉카제국의 일부였으나 1532년 프란시스코 피사로(Francisco Pizarro)가 잉카최후의 왕인 아타우알파(Atahualpa)를 만남으로써 페루의 정복이 시작되었다. 정복자들이 볼리비아 지역에서 필요로 했던 것은 광산의 자원이였다. 세기 말에는 주석의 중요성과 상업성이 인정되어 남부 고원 지대의 오루로(Oruro)요새는 도시로 확대, 발전하게 된다.
17,18세기는 소요의 시대였다. 1617년 포토시에서 바스코 출신들의 소요, 1739년 및 1745년 오루로에서 스페인의 통치에 항거한 원주민들의 소요 등 많은 소요가 일어났다. 그리고 1780~1781년 사이 볼리비아 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란은 많은 원인이 있으나 독립 운동의 전조로 이해될 수 있겟다.
1824년 12월 9일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장군이 아야쿠초 전투에서 승리함으로 볼리비아는 독립을 하게된다. 초대 대통령으로 시몬 볼리바르가 선출되었으며 이를 기념하여 국호를 볼리바르로 명명하였으며 추키사카의 명칭도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장군을 기념하여 수크레로 개명되었다.
1828년 12월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 장군을 지지하는 반란이 발생하면서 3대 대통령으로 그가 추대된다. 그는 확고한 주권 국가의 기반을 수립한다. 또한 1835년 8월 5천명의 군을 이끌고 3등분 되어 있던 페루를 공격, 페루-볼리비아의 연방의 보호자가 되었지만 주변 국가들이 항의하자 1837년 5월 타크나에서 열린 3개 지역 대표회의에서 승인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런 연방체재는 자국에 위협이 된다고 느낀 주변 국가들이 페루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융가이 전투에서 패한 안드레스는 재집권에 실패하여 유럽으로 건너가 거기서 삶을 마감한다. 그가 볼리비아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는 투피사, 라파스에서 일어난 반란때문이었다. 이 반란으로 연방제가 폐지 되고 자유주의 헌법을 제정, 호세 미겔 데 벨라스코 오르베고소가 다음 대통령이 된다. 그 후 페루의 아구스틴 가마라 대통령이 볼리비아를 침공하지만 잉가비 전투에서 사망, 1841년 호세 미겔 대통령 다음으로 호세 바이비안이 집권하여 페루와 평화협정을 맺게 된다. 그는 집권 당시 공공 교육에 관심을 보였으며 군사 학교도 설립하는 등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였다.
1848년 남부 지역의 세력을 바탕으로 호세 미겔 대통령이 재집권 하였으나 북부 지역을 장악한 마누엘 이시도로 벨수가 라파스와 코차밤바 수비대의 지원으로 집권에 성공하였다.
1850년대에는 여러 지역에서 반란이 발생하였다. 동남부 지역에서는 호세 마리아 리나레스 와 호세 마리아 아차 장군이 계속 반란을 일으켰고 안드레스 데 산타 크루스는 유럽에서 호세 바이비안은 페루에서 계속 재집권을 위한 시도를 하여 혼란스러웠다. 1855년 선거로 호르헤 코르도바장군이 당선되었으나 동남부 지역의 호세 마리아 리나레스가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켜 1857년에 집권에 성공한다. 그는 최초의 민간인 출신의 대통령으로서 많은 기대를 하였으나 긴축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독재 정치를 하지만 교회와 성직자들과 큰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초대 민간인 대통령도 1861년 1월 쿠데타로 축출, 호세 마리아 아차가 집권하게 된다. 그런 그도 정책의 실패로 인해 1864년 8월에 마리아노 멜가레호에게 정권을 이양하게 된다. 마리아노는 6년 동안 잔혹한 독재 정치를 하게 되는데, 이런 불만은 반란으로 이어져 결국 아구스틴 모랄레스에 의해 붕괴 1872년 8월에 아구스틴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지만 그런 그도 3개월만에 암살당하여 정국은 혼란에 빠진다.
구테타와 반란으로 정국은 계속 혼란에 빠지고 1879년 태평양 전쟁의 패배로 해양의 출구를 상실하여 내륙국으로 남게 되지만 비교적 자유로운 선거가 실시되어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들은 많은 일들을 하였는데 그중 1888년 8월에 집권한 아니세토 아르세는 철도 건설에 주력, 기관차를 도입하고 많은 도로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1892년에 당선된 마리아노 밥티스타는 칠레와 해양의 출구를 제공한다는 내용의 조약을 체결하여 내륙국이지만 항구를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남부와 북부 지역간의 대립이 심각하여 결국 내전으로 비화되었다. 내전 후 선출 된 호세 마누엘 판도 대통령은 경제 개혁을 시도하였으며 동과 주석값이 상승하여 국가 재정에 큰 힘이 된다. 그리고 브라질의 지원으로 아크레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나 결국 아크레 지역은 브라질로 넘어가고 브라질은 볼리비아에 배상금과 철도 건설을 약속하게 된다.
그 후 많은 대통령이 주변국가와의 관계 정립, 교육의 강화, 공공 사업, 군부의 개혁으로 볼리비아는 평온기를 유지하여 수도를 수크레에서 라파스로 이전하게 된다. 그러나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세입면이 불균형해 졌으며 자유주의 세력에 반대하는 공화파가 결성 되어 결국 자유주의집권이 끝을 맺고 이는 총체적인 혼란을 야기시키면서 무정부화 되어 갔다. 주 수입원인 광산들은 외국 기업에 넘어 갔으며 외화부채로 인해 정부는 뉴욕 금융가들에 의해 조정되었다.
차코 전쟁의 패배로 볼리비아는 방대한 영토를 상실하였지만 국가 통합에 기여한다. 이 통합은 민족 혁명 운동으로 확산되는데 이 운동은 외국 자본가들에 대한 증오심이 발단이 되었다. 따라서 미국과는 적대적인 관계 였으며 지속적인 쿠테타를 일으켰다 이 쿠테타로 빅토르 파스 에스텐소로가 대통령이 되었으며 3대 주석광산회사들을 국유화 하였다. 1956년 8월에는 혁명 운동을 결성한 에르난 실레스 수아소가 집권하게 되지만 쿠테타로 붕괴, 12의 민족 혁명 운동 정책은 중단된다. 이후 군이 통치하게 되는데 그 중 우고 반세르 수아레스는 경재 정책의 변환으로 1975~1977년에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루지만 석유 생산의 침체 높아져 가는 외구 부채로 인해 이 평화도 오래 가지 못하였다. 이에 그는 퇴임을 선언하였다.
늘어만 가는 외채와 불안정한 경제로 인해 정국은 점점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고 그에 쿠테타로 정권이 바뀌는 사례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결국 미국은 외채 3억 4천 1백만 달러의 외채 탕감을 선언, 볼리비아는 숨통이 트이면서 볼리비아는 경제 회복을 위해 국영 기업의 민영화를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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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의 역사  저자  Xtina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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